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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린 상상력의 상담실 07

수박씨

“시끄러워! 손대지 마!”

난 이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상담비를 낼 손님이 아니라는 것도 맘에 들지 않고, 갑자기 상담실에 난입한 주제에 큰소리만 탕탕 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저 녀석이 수염이 북실북실한 ‘남자’라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감히 내 상담실에서 상담비도 내지 않는 남자가 나에게 큰소리를 치다니. 언어도단이다.

하지만 남자는 한 손에 총을 들고 있었고, 나는 익숙지 않은 남자에 대한 존경심을 억지로 짜내고 있는 중이었다.

“아, 선생님. 이 물건이 제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고 해도 인명보다 소중하겠습니까? 지금 건물 밖에는 무장한 경찰이 쫘악 깔려 있습니다. 혹시 잘못해서 선생님의 몸에 큰 해라도 입게 되면 너무나도 큰 손실 아닙니까. 이번에는 남자의 결단으로 일단 항복하시고, 훗날을 도모하는 편이 어떨까요?”

경찰에 쫓기던 이 남자가 내 상담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때는 고작 30분 전이었다. 도대체 무슨 사고를 치고 쫓기는 중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꽤 심각한 일이었나 보다. 순식간에 경찰이 건물을 포위했고, 남자는 나를 인질삼아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물론 내 상담실에는 이런 일도 대비하여 비상시 몸을 숨길 수 있는 패닉룸(집안에서 비상시를 대비하여 콘크리트와 철근 등의 금속물질로 제작한 방 또는 그러한 공간)도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한동안 평화로운 일상이 계속 되었던 탓에 방심한 나는 패닉룸의 존재를 깜박하고 패닉룸입구에 작은 캐비넷을 놓았다. 지금 나는 서류가 가득 들어 무겁기 짝이 없는 캐비넷을 저 남자가 눈치 채지 못하게 잽싸게 옮기고, 패닉룸 안으로 잽싸게 뛰어들 궁리를 하고 있다.

하지만 남자는 잔뜩 흥분하여 위험한 동작으로, 손에 쥔 총을 흔들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본인은 쏠 생각이 없었는데도 총이 잘못 발사되어 내가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남자를 설득하려 노력했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는 듯했다.

“항복! 항복하라고?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저 경찰들을 뒤에서 조종해서 나를 노리고 있는 놈들은 나를 죽이려 하고 있어. 훗날을 도모하기는커녕 체포되는 즉시 나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다고. 전 세계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위대한 나를 죽일 거란 말이다.”

자아분열과 피해망상이 극에 달한 남자다. 세상에 이놈보다 위험한 짐승이 또 있을까? 나는 괄약근에 힘을 주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농성만 벌이고 있다고 해서 무언가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와 함께 좀 더 확실한 해결책을 궁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해결책? 간단하지 네놈을 인질로 삼아 자동차와 비행기를 요구할 거다. 그리고 외국으로 나가서 내 연구를 발표하면 되. 완벽한 계획이야.”

“상대방이 선생님을 죽일 각오가 확실히 서있다면 전혀 쓸모없는 계획입니다. 이 사무실을 나가자마자 저격당하거나, 자동차가 폭탄에 날아가던가, 비행기가 미사일에 격추될 것이 뻔합니다.”

실제로 저격수들이 창문을 통해 저격을 몇 번 시도 했다. 하지만 나의 사랑스러운 방탄유리 창문은 라이플 탄환들을 거뜬히 견뎌 내었다. 이 남자도 완전히 바보는 아니었는지 지금은 나의 상담실이 가장 안전한 대피처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남자는 무너지듯 소파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그럼 어쩌란 말이야?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기아와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이 획기적인 연구를 이대로 사라지게 만들 거냐? 당장 해결책을 내놓지 않는다면 너도 인류의 적으로 손가락질 받게 될 거다.”

남자의 총구를 바라보며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패닉룸 앞의 캐비넷으로 접근했다. 나는 이 남자의 연구에는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그저 다른 곳으로 정신을 쏠리게 하기위해 계속 말을 걸었다.

“이러고 있다가는 저도 같이 죽을 것 같네요. 젠장! 그 대단하다는 연구가 뭔지나 알고 난 다음에 죽읍시다. 선생님 가방 안에 든 것이 뭡니까?”

남자는 경계의 눈빛과, 뚜렷한 우월감을 잔뜩 섞은 눈빛을 빛내며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금고가 들어 있었고, 금고를 열자 또 금고가 들어 있었다. 작은 금고를 열자 조그만 헝겊주머니가 나왔다.

매번 하는 말이지만 나는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놀라지 않는다. 나를 놀라게 하고 싶다면 저 조그만 헝겊주머니에서 바싹 마른 수박씨를 꺼내, 내 난초 화분에 난초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수박씨를 심고 물을 주어, 1분 만에 씨가 발아하고 3분 만에 줄기가 자라나 5분 만에 커다란 수박이 열매 맺게 하는 정도는 해야 한다. 남자는 내 앞에서 이런 기적을 선보였고 나는 입이 떡 벌어져, 패닉룸에 관한 것을 잊고 말았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죠? 수박에 한에서만 생장을 촉진할 수 있는 건가요? 다른 식물에도 적용할 수 있다면 당신말대로 전 세계의 기아를 박멸할 수 있어요. 당신은 이 시대의 구세주가 되는 겁니다.”

나의 칭찬에 남자의 얼굴에, 부끄러움을 감춘 우쭐한 표정이 떠올랐다.

“내말이……. 내가 평생에 걸쳐 이룩한 이 연구는 이 세상에 완전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어. 전 인류의 식욕을 해결할 수 있단 말이다. 하지만 거대한 세계규모의 식품기업과 작물유통기업들이 내 연구를 눈치 채고 나를 죽이려 하고 있어. 세상에 작물과 먹을 것이 넘쳐나면 그 회사들은 망할 테니까. 고작 돈 때문에 세계 평화를 죽이려 하고 있다고. 돈에 매수된 경찰들은 나를 테러리스트로 몰고 있어. 내가 새로운 폭탄을 연구하고 있으니까 나를 죽이고 내 연구를 모조리 태워버려야 한다고 떠들고 있단 말이야. 이봐,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이건 너무 아까운 일이야.”

물론 나도 아까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남자의 적을 확실히 알고 나니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 빌딩을 포위한 경찰들이 일반경찰이라면 인질이 위험할 작전을 함부로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돈을 먹은 경찰들이라면? 돈 앞에 사람이 얼마나 흉포해지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내 목숨도 명재경각이라는 것을 이해 할 것이다.

나는 세계의 평화보다 내 목숨을 우선했다.

“아이고, 선생님. 이런 사정이 있으면 진작 말씀을 해주셨어야지요. 제가 선생님이 탈출 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어, 어떻게…….”

나는 남자의 말을 듣지도 않고, 캐비넷을 치웠다.

“저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비하고 있지요. 이 캐비넷 뒤에는 밖으로 빠져 나가는 비밀 통로가 있습니다. 얼른 이곳으로 빠져 나가세요.”

물론 거짓말이다. 하지만 내가 패닉룸의 문을 열자 남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궁지에 몰린 사람에게, 벽에 열린 입구는 반드시 비밀통로의 입구로 보인다.

“어서, 어서, 어서 이리로 들어가세요. 빨리, 빨리!”

나는 남자가 제정신을 차리기 전에 서둘러 남자를 패닉룸 안으로 몰아넣었다. 남자는 ‘어어어~’하는 표정으로 패닉룸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감사를 표하려는 듯 했다. 하지만 나는 남자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패닉룸의 문을 닫고 단단히 잠갔다. 문이 잠겨짐과 동시에 나는 건물 밖으로 뛰어 나갔고, 경찰들은 내 상담실로 돌입했다. 나는 체포당하는 남자의 모습조차 보지 못했다. 어쩌면 바로 살해되어 시체 주머니에 담겨 나갔을지도 모르겠다.

경찰특공대의 돌입으로 엉망이 된 상담실을 정리하며 별다른 죄책감은 느끼지 못했다. 세계의 평화와 자신의 생명 중에 후자를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나 말고도 잔뜩 있을 것이다

상담실의 정리가 대충 끝나니 목이 마려웠다. 하지만 정수기는 박살이 나서 뒹구는 바람에 마실 물이 없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무사한 나의 난초 화병과 수박이 눈에 들어왔다. 묘하게도 수박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갈증이 심했던 나는 수박을 칼로 썰어 한 조각 맛을 봤다. 새빨갛게 잘 익은 모습 그대로, 수박의 맛은 아주 달고 훌륭했다. 나는 혼자 수박 한통을 다 비웠다. 갈증이 사라지고 포만감을 느낀 순간 뭔가 울컥하고 치밀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드디어 나의 양심이 눈을 뜬 것인가? 세상을 구할 영웅을, 값싼 공포심에 팔아먹은 것이 이제 후회되는 것인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느낌이 더욱 심해졌다. 급기야는 정말로 무언가가 내 목을 역류해서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울컥!”

내 목구멍을 통해 수박 줄기가 내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아뿔사! 수박을 먹으면서 씨앗을 한 두 개 같이 삼켰나보다. 그것들이 뱃속에서 자라는 중…….